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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과자/게임

렌 드 플뢰르

by *새벽하늘 2015. 11. 8.



렌 드 플뢰르  HP

오토메이트


 렌 드 플뢰르. 발매 전부터 우스바 카게로의 미려한 원화를 전면으로 내세워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던 게임이다. 여기에 내용도 충실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매 후의 평은 영 좋지 못하다. 이걸 빌려주신 분도 '예쁜 쓰레기'라 평하면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하면 좋다고 하신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 길로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일단 원화는 여성향 게임 원화가 중 탑급에 속하는 우스바 카게로가 맡은 만큼 아름답다. 작화가 무너지는 일도 없으며, 스탠딩 스틸의 높은 퀄리티가 스틸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게임은 원화가 전부가 아니다. 비주얼 노벨은 음악, 성우, 그림,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가 합쳐진 이른바 종합 예술이지만, 그래도 중심축은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아무리 치장을 해도 게임이 재미가 없다. 


 그렇다면, 썩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이 게임은 이야기가 재미가 없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가 없지는 않다. 오히려 특정 캐릭터의 루트는 꽤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게임의 세계관상으로 어떻게 마무리를 짓든 간에 깔끔한 엔딩을 내기가 어렵고, 그 결과 플레이어에게 상당한 찜찜함을 남겼다는 점이 이 게임이 저평가를 받게 만든 이유라 할 수 있다. 모 아니면 도의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 - 그것도 양쪽 모두가 파멸로 치닫는 - 하에서 어느 정규 엔딩도 이 둘을 완전히 쟁취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재미있게 플레이하긴 했지만, 추천은 못 해 주겠다'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내가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나도 속으로 경악했던 루트가 있었는데, 레온 애정엔딩이었다. 이 엔딩은 상당히 별로다. 하필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정규 엔딩이 이 엔딩이었는데, 하마터면 감상 따위는 집어치우고 큰 글씨로 '하지 마' 라고 쓸 뻔한 충동이 들 정도였다. 사랑을 위해 다른 모든 이들을 죽이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건 그들에게 결정권이 없는 상태에서, 양극단의 선택을 강요받아 나온 결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애정 엔딩으로 돌입하는 루트에서 파생하는 배드엔딩이 진짜 애정엔딩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여기까지라면 괜찮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서 희망을 암시하는 마무리 부분인데, 아무리 희생자의 동의하에 일이 진행되었다 할지라도 죄를 짊어진 이 선택을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죄의식을 희석시키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밝혀두지만 나는 딱히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엔딩은 너무나도 별로였다. 특히 끝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괜찮았던 캐릭터는 두말할 것도 없이 기스란이었다. 정확히는 충성 엔딩. 충성엔딩 마지막에 신에게 도전하러 간다는 한 문장은 해당 엔딩의 화룡점정을 찍는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정규 엔딩 분기 전, 평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그가 자신에게 처한 불합리함 그리고 발현된 광기로 지하감옥에 갇혀버렸을 때 토해내듯이 한탄하는 독백 비슷한 대사도 참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 장면은 연기도 수준급이라 직접 들어보는 게 훨씬 좋을 듯싶다. 


 그리고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아니지만 유벨이란 캐릭터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유벨은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엔딩이 애정과 충성이 아닌, 애정과 '복종'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복종 엔딩이 여태까지 내가 플레이해 온 여성상 중에서 정말 드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그를 사랑한 나머지 그를 구속하여, 정신까지 파괴할 정도에 이르는데, 신선해서 꽤 볼만했다. 뭐든 잘 접해보지 않은 건 재미있다.


 사실 게임 초반만 해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요소 없이 정말 우직하게 세계관 내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생각했었다. 모 캐릭터의 정체가 정체라도 납득했다. 아, 이랬구나. 그럴 수 있지 뭐. 하지만 그 캐릭터에게만 그런 줄 알았던 특수 상황이 알고 보니 너도, 알고 보니 쟤도라는 상황이 되어버리면서 기껏 모 캐릭터에게 붙은 설정이 빛이 바래게 되고, 결국에는 심드렁해지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평범 속에서도 시나리오를 쓸 수는 있을 텐데 굳이 모든 이들에게 특수 상황을 부여해야 했나 싶다.


 오토메이트는 매 게임마다 새로운 시스템을 집어넣는데, 이번 작에서는 '라비르'라는 것을 집어넣었다. 라비르란 대화를 통해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대화 시스템인데, 시작하기 전에 미리 저장할 것인지를 물어봐서 혹 실패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라비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커맨드도 존재하고 말이다. 템포 자체도 강제 오토모드에 의한 실시간 선택도 아니라 천천히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라비르를 다 끝내고 난 뒤의 이유 없는 커맨드 입력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 이 포스팅은 허당님의 협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