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死印) HP
EXPERIENCE
사인(死印)은 도시 전설이나 괴담에서 연유한 전형적인 일본식 공포게임이다. 작중에서는 표식(印)이 새겨진 자는 죽(死)게 된다는 도시 전설이 있는데, 타이틀도 여기서 따왔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로 일어나게 되고, 게임은 표식을 새긴 주체인 귀신(怪異)을 퇴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공포심이 생겨나는데, 사인에서의 공포는 오컬트로 언젠가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보다는 현실의 수단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한,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근원적 공포와 불안이 주이다.
게임은 가격에 걸맞게 사용된 리소스도 매우 한정적인데 그 한정적 자원을 분위기로 잘 승화시켜 플레이어의 공포를 최대한 조장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깜짝 장치도 심장을 짜릿하게 한다. 특히 동경의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피그말리온적 신념에 주로 이용되는 라이브 2D를 귀신에 입힌 건 신선했다. 단지 불만은 그 한정된 리소스 중에서 성우의 대사도 있는데,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잊을 만하면 대사가 나오고 하니 공연히 집중을 깨트린다.
분량도 예외 없이 가격이란 대전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야기는 5화로 옴니버스 구성인데, 각 장은 클리어하는데 2~3시간 정도로, 10시간~12시간이면 엔딩을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은 이야기 길이에 비하면 많지만, 해당 에피소드에서만 활약하고 마는 일회성 등장이 대부분이라 사실 의미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이야기는 옴니버스 5화를 관통하여 이어지므로 옴니버스의 특유의 허전한 느낌은 덜한 편이다.
게임은 탐색 및 전투파트와 노벨파트로 나누어지는데, 탐색파트에서는 공간 탐색과 아이템 수집, 그리고 수집한 아이템을 사용한 귀신과의 턴제 대치로 이루어진다. 턴제 전투는 얼핏 보기에 엉성해 보이나 거리별 유효거리나 연계 공격이 있어서 생각보다는 갖춰진 느낌이다. 그리고 노벨파트 또한 생사를 가르는 상황에서는 체력제한형 선택지가 등장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한다. 지루하지 않게 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텍스트의 분량이 꽤 되는데도 기독/미독 스킵을 구분해서 하는 기능이 없으며, 속도가 빠르지 않은데도 스킵이 L1트리거를 계속 눌러야 작동하는 건 역시 불편하다. 2회차 요소도 없으며 갤러리나 클리어 특전 메뉴가 따로 없는 것도 다소 아쉽다. 그 와중에 원화도 미려함 속에 일상 속의 균열을 조화시킨 게 인상 깊었지만,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장면에 여성의 나체/반나체 스틸이 등장하니 신나던 마음이 팍 식는다.
여기까지라면 취향은 갈리지만 게임을 추천해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스토리 중 5화에서 발생한다. 원래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인데, 5화가 2차 세계전쟁 중에 입안된 영(霊)적 병기 개발 계획과 그에 따른 생체 실험에 얽힌 이야기라 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생체 실험의 윤리성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단어가 서브컬쳐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언급된다는 게 불쾌하다. 아무런 고찰 없이 잠시 지나가는 요소로 차용할 정도로 이러한 소재에 대한 무게가 그들의 입장에서 가볍다는 거니까 말이다. 미리 알았다면 게임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