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scarlet HP
TOYBOX
이야기 외적인 부분에 힘을 넣은 게임이다. 참 잘 만들었다. 프롤로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창문 사이로 바깥 풍경이 지나가며 햇빛이 쏟아지거나, 아침이 찾아올 때 마을이 점점 밝아지는 장면이 글자 그대로의 효과로 게임 내에서 구현된다. 몇몇 장면은 게임 자체 엔진에 의한 효과로는 한계가 있는지 동영상이 따로 삽입되었지만, 이 둘이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둘의 완성도는 비등하다. 화려한 효과 때문에 도리어 게임이 무겁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스킵할 때 외에는 무겁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단순히 배경의 시각적 화려함을 연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텍스트 어드벤처의 핵심인 '텍스트'에 기반하여 착실하게 시청각적 효과를 연출한다. 지문에 '매미의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등과 같은 내용이 나오면 그에 맞춰 배경이 선명해지거나 흐려지고, 소리가 커지거나 작아진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 또한 끝부분을 페이드아웃으로 처리하는 세심함도 보인다.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감탄스럽다.
이 게임의 장르인 연애 미스터리 어드벤처 중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내는 데도 충실하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시골 도시에서 가끔 엿보이는,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경음도 없이 벌레 소리만 들릴 때도 있으며, 들릴 듯 말 듯한 음산한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그리고 - 여러 루트에서 지겹도록 보았을 -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는 기괴한 고양이 가면은 트라우마로 남기에는 충분하다. 타이틀 콜에서도 '도망쳐'라는 말이 가끔 들리는 것도 조금은 소름 돋는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도 범인의 목소리에 음성처리를 안 해서 잘 차린 밥상을 스스로 엎어버리는 멍청함을 보이는 게임이 몇 있는데, 이건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아 범인이 누군지를 의심케 하는 긴장감도 부여한다.
하지만 그 분량은 풀 프라이스를 생각하면 다소 짧다. 속도가 안 붙어 천천히 읽었음에도, 평일 저녁 시간만 이용해도 다음 날이면 루트 하나를 다 깰 수 있었다. 이런 분량이 정가로 6804엔이다. 어느 정도의 분량을 채운 게임이 모두 잘 만든 게임이 되는 건 아니지만, 잘 만든 게임은 모두 개연성을 갖출 정도의 분량을 가진다. 더 문제는, 이 게임이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연애도 장르의 한 축으로 품고 있다는 것에 있다. 미스터리도 다뤄야 하고, 연애도 다뤄야 하는데, 분량이 분량이니 그 중 어느 쪽은 - 어쩌면 양쪽일지도 모르지만 - 황급히 수습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연애라는 장르의 한 축이 타격을 받는다. 연애 쪽의 서술은 특정 이벤트에만 치우치고 나머지는 미스터리가 그 광대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러니 도대체 왜 사랑에 빠졌을까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서술이 조금만 많았어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을 텐데.
미스터리 쪽은 굳이 모험은 하지 않고 정석을 밟아가는 행보를 취한다. 진부하지만 안전한 길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깔아둔 의문스러운 점들도 적당히 잘 회수한다. 루트가 거듭될수록 서서히 밝혀지는 비밀과 인물 간의 관계도 흥미롭다. 절대적인 텍스트양은 부족하지만, 얼개는 잘 짜인 편이다. 하지만 이 얼개를 짜 맞추는 데는 순서가 있어서, 제작진은 플레이어의 플레이 순서를 시스템상으로 제한하고 있다. 루트는 나누어져 있지만, 사실상 일직선 진행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 눈에 띄게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지막 캐릭터까지 다 보게 되면 인터넷 오프모임으로 모인, 언뜻 보기엔 이방인으로 보이는 그들이 사실은 어떤 형태로든 한때는 이 마을에 살았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그들이 모두 어떤 형태로든 주인공과 얽혀있다는 걸 강조하고자 과거에 이곳저곳에서 꽂고 다녔던 플래그는 다소 작위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상 장면을 서술할 때 풀어내는 문체이다. 이 문체는 신선도가 떨어져 대화를 보다 보면 가끔 옛날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문화의 차이를 생각하더라도 웃음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다. 지금으로써는 전혀 먹히지 않는 90년대 시트콤을 보는 듯한 장면이 적잖다.
전반적인 시스템은 언뜻 보아 쾌적한 듯 보이지만, 군데군데 갖춰야 할 것이 조금씩 빠져있다. 우선 과거 로그를 볼 때 선택지 말고는 모두가 똑같은 창으로 구분되어 독백 및 등장인물 간의 구별이 전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요즘 게임답지 않게 설정 창으로 호감도를 볼 수 있는 기능도 없다. 예전의 순수 텍스트 어드벤처 형식을 취한다. 아이 캐치는 있지만, 그게 없더라도 선택지 자체가 굉장히 정석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정석적인 대사라 정답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분기를 가르는 선택지, 그리고 노멀엔딩과 해피엔딩을 가르는 선택지 또한 게임을 해 봤다면 '감'으로 어딘지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난이도는 낮은 편이다. 그러나 특정 상황에서는 아이 캐치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 소소하게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오토메이트와 함께 개발에 참여하는 회사는 거의가(모든 게임의 개발회사를 본 게 아니니) 여성향 게임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라, 이런 회사와의 합작으로 나온 게임은 굉장히 신선했다. 비록 장르의 양 축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데 실패해 '연애 미스터리 어드벤처'를 구현하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차라리 장르명에 연애라는 단어를 떼어내고 약간의 호감만 가지는 정도만 서술했다면, 굳이 연애 어드벤처의 결과물을 넣고자 하룻밤 만에 만리장성을 쌓는 듯한 당황스러움은 주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성향 브랜드라는 것에 얽매여 게임의 장르를 한정시키고, 이런 어정쩡한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시도 자체는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 이 포스팅은 허당님의 협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