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만 무성하던 게임이 아니었다. 너무 유명하면 오히려 반감만 생기는데 막상 해 보니 플래티넘 트로피라는 목표 없이도 기꺼이 다회차 플레이를 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웅장하게 흐르는 초반의 영상과, 이와 큰 차이 없는 퀄리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인게임 그래픽, 비장한 음악 위에 펼쳐지는 별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무모한 도전. 여기에다 세계의 비밀, 조직의 비밀, 그리고 주인공의 비밀까지 숨겨져 있어 흡입력은 굉장하다. 인물들은 상처 입으면서 나아가고 연대해나가며 진지한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가끔씩 터져 나오는 소소한 웃음거리도 있어 숨이 막히지는 않다. 허세나 잘난 체 등에는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지지만 동시에 또 멋있다. 일본 하위문화에 대해 안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의 구현화다.
그러나 이 게임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게 해 준 요소 중 일부는 끝까지 그 수준을 유지하진 못한다. 영상 내에서 그래픽이 무너지는 부분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솔직히 전문가도 아니고 그래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지는 않는 편이지만 이건 심각한 수준이다. 중반부터 에어리스가 다시 등장하여 엉겁결에 꽃도 조명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원경도 아니고 근경에 있는 물체가 전세대보다 못한 수준으로 구현돼있다. 해상도가 낮은 사진을 억지로 확대하여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수준이다. 다른 물체는 대부분 잘 만들어져 있는데 왜 꽃만 그런지 의문이다. 하나가 신경 쓰이니 인물의 머리가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점이라던가, 사소한 대화도 마치 연극처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몸짓을 곁들이는 점도 거슬리게 된다. 시각적인 부분이 아무렴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부분인데 구성요소들의 뒷심이 부족한 게 아쉽다. 에어리스가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의 대화를 구사하고 있는 것도 신경 쓰인다. 원작을 하지 않은 입장에서도 명확하게 보이는 '불필요하게 늘린 부분'은 어떤 의도가 깔려 있는지 뻔히 보인다.
그래도 이외에는 정말, 다 좋다. 음악의 종류가 다양한 데다가 호흡도 길다. 전투가 길어질 때 비슷한 선율이 계속 반복되어 귀가 지루할 일이 적다. 부임무를 할 때 말고는 중복되어 사용되는 음악도 거의 없을 정도다. 같은 선율을 공유하는 음악은 제법 존재하나 편곡이 달라 새로운 맛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장소가 전환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른 편곡의 음악으로 재생되는 데 사용된다. 물론 선율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감탄이 절로 나온다.
준비된 영상도 많아 눈이 즐겁다. 그런데 과거 회상이 이상하리만치 잦으며, 클라우드의 두통과 함께 찾아오는 환영도 심상치 않다. 모든 게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하 내용 누설 및 억측이 있어 접어둠)
마지막을 보면 에어리스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현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초반에 필러가 뭔지도 모르는 듯 보였는데 이상하다. 아마 클라우드를 운명의 개척자로 삼기 위해 의도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또한 에어리스는 출신 탓에 시설에서 내내 자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열차 묘지에서의 에어리스의 회상은 진실이라기엔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마찬가지로 클라우드도 솔져라는 출신을 생각하면 딴엔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과거 또한 일부 조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클라우드의 환상은 세피로스와 관련된 것인데 발작을 일으킬 때는 거의 근처에 '리유니온'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특징을 가진 자들 중 한 사람이 존재한다. 세피로스는 아마 이들을 매개로 나타나는, 사념체에 가까운 존재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클라우드는 왼쪽 팔을 잡으며 아파한다. 세피로스 테마곡은 편익의 천사이고 마지막 전투에서 오른쪽 날개를 펼친다. 그렇다면 클라우드의 통증, 추락할 때 클라우드에게 '주인'이라 칭하는 세피로스의 말을 종합하면 클라우드는 왼쪽 날개를 소유한 자로 생각해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세피로스와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본인은 솔져라고 칭하지만, 능력을 얻은 경로는 다를 확률이 높으며 어쩌면 비슷한 능력을 지닌 예외적 존재일 것이다. 아마도 과거 잭스라는 검정 머리를 한 자에게 업혀 미드갈로 귀환할 때, 세피로스와 관련된 모종의 실험에 투입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피로스는 고대종이라 자칭하나, 진정 고대종인 에어리스가 자신을 해당 명칭으로 부르는 걸 내켜 하지 않는 걸 볼 때 세피로스 또한 모종의 실험에 투입되어 개조당한 인간일 수 있다.
그렇지만 원작을 한 사람들에 의하면 본 게임은 초반을 겨우 마친 정도라고 하니 의문이 풀리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어떻게 운명에 저항해 나갈지, 숨겨진 비밀이란 도대체 뭔지 정말 기대된다. 초반도 이 정도인데, 이 뒤에 휘몰아칠 전개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당장 후속편이 나올 기미는 없으니 아무래도 그때가 되면 또 복습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보통은 게임을 끝낸다. 그렇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이대로 묻어버리기엔 마음에 걸려 미련 섞인 2회차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곱씹기 위해서인데, 하다 보니 전투가 더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전투는 실시간으로 전개되어 긴장감이 있다. 하지만 본질은 턴제 게임이라 특수 명령어를 입력할 때에는 일시 정지에 가까운 속도로 게임이 흘러가니 명령어 때문에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어 안심된다. 물론 이조차 힘든 사람들을 위한 쉬움 난이도도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아예 턴제 전투로 진행될 듯한 클래식 난이도가 있다. 하지만 클래식 난이도는 실상 쉬움 난이도 기반에 전투가 자동으로 진행될 뿐이라 턴제 게임의 본연의 모습은 아니다.
처음 게임을 했을 땐 냅다 체력을 깎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하드 모드로 2회차를 하다 보니 1회차의 경험을 살려 약점을 적극 활용하거나, 여태까지 습득한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묘미가 있다. 파고들면 들수록 훨씬 더 다양한 운용이 가능해 재미가 붙는다. 처음에는 다른 게임 할 때의 습관으로 무작정 회피를 썼는데, 알고 보니 회피가 무적이 아니었다. 태생이 턴제 게임이라 그런지 방어로 넘겨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는데 명시가 안 되어 있어 한참 동안 고생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풀어나가든 간에 보통 난이도 기준으로 어찌어찌 게임을 끝낼 수는 있게 만들어 둔 걸 보면 정말 난이도가 절묘하다. 덕분에 3월을 아주 즐겁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