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루
어쌔신 크리드 3의 주역 라둔하게둔(코너)에게 있어 암살자란 수단이었다. 큰 건 바라지 않았다. 그저 원래 살던 곳에 평화롭게 살게만 해 주십사하는 것만이 소망이었다.
라둔하게둔이 속한 이로쿼이 부족은 원래부터 미국 땅에 정착해 살았지만, 이른바 선진 - 기술만 선진이었지 의식은 선진이 아니었다 - 문명을 지녔단 것만으로 이민자들에 의해 야만인이라 업신여겨진다. 그랬기에 그의 열망은 사람다운 삶을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이름도 출신도 덧씌워가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계략으로 인해 소원해진 동포들과의 관계였다. 절망감이 클 텐데도, 세상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지언정 여전히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 그는 박해받는 순교자였다가, 어느 순간을 넘어서는 집념에 사로잡힌 망령과 같아진다.
'너와 네 부족 그리고 고통받는 다른 이를 위해서'였던 라둔하게둔의 전쟁은 저택의 도끼를 뽑는 것으로 끝난다. 지킬 것이 손에서 떠나갔는데 굳이 암살자로 더 활동할 이유는 없으니 당연하다. 암살자는 그에게 있어서는 굴레와 같았다. 그에게 암살자의 길을 걷도록 종용한 주노의 신탁물도, 암살자로서의 인생을 상징하는 코너라는 이름과 함께 묻어버린다. 마약처럼 취해 있던 템플기사단의 초상화도, 전부 소각한다.
모두 끝나고, 독립을 맞이한 미국이었건만 여전히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선지자 - 주노는 목적은 달성했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적인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성취가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 한 몸 희생해서 세상이 바뀌는 영웅 같은 전개는 역시나 이상 속에서만 성립하는 공식이었다. 여과 없이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아프기만 하다.
△ 아버지와 아들
특이하게도 게임은 주역인 라둔하게둔이 아닌 그의 아비 헤이덤으로부터 시작한다. 시간 순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쌔신 크리드 로그를 먼저 했더니 헤이덤이 누구인지 이미 알아 버려서 시퀀스 3에서 밝혀지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그리고 아들 라둔하게둔은 시퀀스 4에서부터 나온다. 헤이덤은 카니에티오가 임신한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가 암살자가 되고 난 후 적으로 만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이 지난 후 헤이덤은 라둔하게둔을 아들이라 부르며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처럼 일종의 - 구질구질하지만 - 정을 느끼는지 이전의 냉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조금은 물러지기 시작한다. 물론 플레이어는 헤이덤과 라둔하게둔의 관계를 알고 있긴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몰랐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알았는지 의아스럽다.
물러진 헤이덤에게서 라둔하게둔은 공존의 가능성을 잠시 꿈꾸기도 했지만, 과정이 같을 뿐 근원은 확연히 다른 것이라 결국은 존속살해라는 길을 밟는다. 그렇지만 그 주장은 꽤 그럴싸하게 들리는데, 이게 바로 어쌔신 크리드 로그의 시발점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 간과할 수 없는
생각할 거리도 많으며, 인물도 매력적인 게임이지만 모든 게 완벽하진 않은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몇 있었다. 잡화점에 갔더니 늙은 여인이 좋은 이유 9(?)가지를 들며 골 때리는 소리를 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몰랐다고는 하나 임신만 시키고 뒷일은 책임지지 않으며 추억만 곱씹는 나쁜 아버지 헤이덤 켄웨이가 이야기 안에서는 제일 별로라고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영상이 삽입될 때마다 깐깐하지 않음에도 딱딱하게 느껴지는 연기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눈동자가 너무도 거슬린다. 잘못 표기된 화자, 자막 싱크 밀림은 예사다.
시스템은 또 어찌나 별로인지. 버그가 산재하고, 강제종료는 예사에, 트로피도 전체 동기화 100%라는 정신적으로 지치는 걸 세워놓았다. 이건 DLC 트로피에서도 똑같이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또 부가목표가 게임 종료 후 저장되지 않아 반드시 본 이야기를 다 밀어놓고 부가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황당함도 있다.
여기에 미니게임으로 넣어놓은 나인 멘즈 모리스. 말을 일렬로 세워놓을 때마다 선택이 안 되어서 도대체 이건 안 고치고 뭐 했냐고 속으로 험한 말을 엄청나게 했지만, 사실은 내가 규칙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거였다. 말을 일렬로 세운 후 제거할 상대 말을 하나 선택해야 진행이 되는 거니 제발 나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럼에도
주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난 뒤 트로피를 따기 위한 과정이 힘들어서 그렇지, 게임은 좋다.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무상함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암살자가 인생이 아니라, 인생의 과정으로서 암살자를 거쳐 간 라둔하게둔이 인간적이라 좋았다. 자신이 멸시당했기에, 적임에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존중해주는 인품이 아름답다.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하며 원리원칙을 밀고 나가는 그 순수함에, 끝이 정해져 있음에도 행복을 바라게 된다. 뒷이야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는 게 여운이 있어 좋은 것 같다.
△ 현대
여지없이 깨닫는다. 어쌔신 크리드는 역사 게임이 아니라 현대의 이야기를 다루는 거란 걸. 목적을 위해 과거를 탐방하고, 과거를 재현한 애니머스 시스템에서 현대의 주인공인 데스몬드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은 역시나 의미심장하다. 유기적인 흐름이 이후의 작품에서도 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라일라 핫산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봐왔음에도 어딘지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다. 분량만이 문제가 아니다.